낙산길 새 회상 교화지 따라 걷는 길
창신낙산길
새 회상 교화지 따라 걷는 길
- 소요시간: 약 1.5시간
- 총 거리: 약 2km
*오르막길이 있습니다.
옛 동대문부인병원터
(현 흥인지문공원)
서울 서울 종로구 종로 285
(지번) 종로6가 65-6
황정신행 부부가 운영했던, 회화나무가 있었던 이곳에 소태산 대종사 친히 방문하여 법설을 하다
동대문부인병원은 한국 최초의 부인병원이다. 감리교 스크랜튼 목사가 1887년 미국 감리교 여성 해외선교부에 병원 설립기금 요청서를 제출하고 같은 해 10월 미국 여의사가 내한해 이화학당 구내에서 치료를 시작했다. 명성황후는 이 병원에 보구여관(保救女館)이라는 이름을 하사했고 정동에 있던 보구여관이 동대문으로 이전을 해 온 뒤 이 병원과 통합돼 1930년부터 ‘동대문부인병원’으로 불렸다.
황정신행과 부군 강익하는 1938년 10월, 미국으로 떠나는‘美 감리교회 조선부인 선교사 유지재단’으로부터 38만 원을 주고 종로 6정목 70번지, 11,880m²의 대지에 4층 병원 건물 1동과 2층 주택 건물로 되어 있던 동대문부인병원을 인수한다. 황정신행은 병원 자택으로 소태산 대종사를 수차례 초빙해 식사를 대접하였으며, 황정신행의 부군 강익하의 질문에 답한 일화와 사람이 죽어 음산하게 여기는 병원 지하실에 내려가시어 이 기운을 평범하고 자연스럽게 여기도록 돌리신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소태산 대종사 열반 후 일본군 ‘정신대’를 면하기 위해 박은섭, 이용진, 송자명, 송영봉, 정양진, 김서업 등이 이 병원에 취업하여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월급을 받으면 익산 총부로 보내 자신들의 공부비용을 스스로 만들고 야간 수당으로 생활해 나갔다.
「원불교 서울 성적지」기연 법문 및 순례 길라잡이
<소태산, 서울京城을 품다> 방길튼 저 (p.464)
원불교 서울교당 창신동터
(원불교 성적 제 15호)
서울 종로구 창신길 144-2
(지번) 창신동 605
서울 최초의 교당이요, 서울 교화의 싹을 틔운 곳.
영광(영산)지부, 익산본관에 이어 세 번째로 마련된 경성출장소 창신동 회관은 서울 경성에 새 회상의 교화지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실질적으로 최초의 지방 교화지이다. 이 창신동 골짜기의 창신길은 제생의세를 위하여 걸음걸음 교화의 행보를 디디신 소태산의 땀방울이 맺혀 있는 길이다.
소태산 대종사는 경성역에서 전차를 타고 동대문 종점에 내렸고, 약간 가파르고 좁은 골목의 창신동 골짜기를 따라 창신동 경성출장소에 도착했을 것이다.
경성출장소는 이동진화가 자신이 수양채로 사용하고 있던 대지(창신동 650번지)와 목조 초가 5칸 1동, 4칸 1 동을 희사하여 원기11년(1926) 7월경에 마련됐다.(당시 전주회원 이청춘에 이어 두 번째로 큰 희사) 경성출장소는 10일에 한 번씩 보는 매 6일 예회로 10여 명 정도가 모였으며, 방이 비좁아 무릎이 서로 맞닿을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익산총부를 제외한 곳에서 소태산 대종사가 가장 많은 법문을 설한 곳이 경성출장소 창신동 회관으로, 이 곳에서 기르던 고양이가 자력양성의 법설 예화로 등장하기도 하며, 원기14년(1929) 陰 5월 16일 예회록을 보면 동산에서 앵도(櫻桃)를 따서 먹은 기록이 있어 회관 주위에 앵두나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원불교 서울 성적지」기연 법문 및 순례 길라잡이
<소태산, 서울京城을 품다> 방길튼 저 (p.465)
성주(聖呪) 기연지
소태산은 병인년 12월초에 상경하시어 원기12년(1927) 1월 12일(丙寅 12월 9일)에 경성출장소 창신동 회관에서 「재가선법(在家禪法)」과 「고락의 원인」에 관한 법설을 한다. 이 창신동 회관 법석에서 이공주는 소태산에게 “수양은 어떻게 해야 되는지?” 묻게 되며 이 문답이 기연이 되어 ‘성주(聖呪)’가 탄생하게 된다. 결국 이공주와 성성원에 주었던 시구가 ‘성주(聖呪)’가 된 것이다. 이공주는 소태산께 여쭈었다. “불법을 공부하려면 수양의 힘을 얻어야겠는데 수양은 어떻게 하여야 되겠습니까?”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는 좌선을 하고 저녁 자기 전에는 염불을 많이 하시오.” “염불은 무슨 염불을 하면 되겠습니까?” “나무아미타불을 많이 하시오.” “젊은 사람이 어찌 나무아미타불을 하겠습니까?” “그럼 시구(詩句)는 읽을 수 있겠소?” 하시고 시구 하나를 지어 불러주시니 <거래각도 무궁화 보보일체 대성경(去來覺道無窮花步步一切大聖經)>이었다. 같이 법문을 받들고 있던 성성원이 여쭈었다. “저도 하나 지어 주십시오.” 소태산께서 다시 시구를 지어 주시니 <영천영지 영보장생 만세멸도 상독로(永天永地永保長生 萬歲滅度常獨露)>라. 이 날의 시구를 합하여 후에 영혼 천도를 위한 성주(聖呪)가 되었다. 이공주와 성성원뿐만 아니라 경성회원들은 소태산이 지어준 이 시구들을 틈틈이 외우며 공부하였다. 소태산은 훗날 이 시구를 합하여 영혼천도를 위한 성주로 사용하게 한다.
낙산 기슭
서울 종로구 낙산길 41
(지번) 동숭동 산 2-10
소태산대종사, 돈암동회관 신축 당시 일을 마치고 제자들과 염불했던 곳
낙산은 서울 종로구와 성북구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산이다. 서울을 둘러싼 남산, 북악산, 인왕산, 낙산 가운데 좌청룡에 해당하는 산이다. 산 모양이 낙타의 등과 같다고 하여 '낙타산', '타락산' 등으로 부르던 이름이 변해 '낙산'이 되었다.
낙산에 오르면 서울 동쪽 시내를 내려다볼 수 있다. 팔타원 황정신행선진께서 손수 지으신 이화장과 원기 46년 정산종사께서 위암 수술을 받고 입원하셨던 서울대학교 병원을 볼 수 있다. 정산종사께서 위암 수술 후 신음 한번 없이 누워계시니 병원 관계자들이 감동하며 꼭 부처님 같다고 이야기했다는 일화가 있다.
낙산은 원기 17년 초, 이공주 선진께서 창신동 경성출장소 요인들과 대종사를 모시고 돈암동 새 교당 터를 보러 가셨을 때도 지나가셨을 것이다. 원기 18년 7월부터 4개월간 돈암동 경성지부 신축공사가 시작되었는데, 대종사께서 올라오셔서 총 70여 일정도 직접 공사 감역을 하신다. 일과가 끝나면 낙산 정상에 올라 돗자리를 깔고 오창건, 정일지 두 제자와 함께 온 산이 울리도록 염불하셨던 곳이기도 하다.
박혜현·정릉교당 교도·서울원문화해설단 부단장
원불교 서울교당 돈암동터
원불교 성적 제 16호
(현 삼선공원)
서울 성북구 삼선교로4길 147
(지번) 삼선동 303
서울 최초의 신축교당이요 일원상 봉안지로, 이곳에서 교리강습회를 최초로 시행하다.
낙산공원에서 나무계단을 따라 내려오면 원불교 최초 신축교당인 경성지부 '돈암동 회관 터'가 나온다. 이공주는 원기15년부터 재가회원으로 경성출장소 교무을 역임하면서 실질적으로 전무출신 생활을 시작하다가 익산본관으로 출가할 뜻을 밝힌다. 당시의 창신동 경성출장소는 회원이 점점 늘어 20여명이 넘자 예회 보는 공간이 비좁아 불편하였으며 상주 인원이 4~5명에 이르러 새로운 회관을 물색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소태산 대종사는 이러한 상황을 보시고 이공주에게 “경성출장소는 집도 협착하고 유지형편도 어려우니 공주가 여기 있어서 집이라도 하나 마련해 놓고 유지대책을 세워 놓은 뒤에 나오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말씀하신다. 이에 이공주를 비롯한 경성회원들이 새로운 기지를 물색하여 낙산 너머의 장소를 답사하고 소태산 대종사 상경하시니 함께 물색했던 낙산 아래 앵두나무골을 둘러보게 된다. 소태산 대종사, “수도원 기지로는 하늘이 주신 곳이다.”며 기뻐하신다. 이에 이공주는 자신의 사가인 계동 집을 처분하여 돈암정 509, 510번지 585평을 매입하게 된다. 이곳이 바로 경성지부 돈암동 회관인 것이다. (現 삼선공원 어린이 놀이터: 삼선 제1동 288-1번지 571평, 한성학원 소유: 삼선동 1가 288-2번지 14평)
「원불교 서울 성적지」기연 법문 및 순례 길라잡이
<소태산, 서울京城을 품다> 방길튼 저 (p.470)
황정신행과 이화장
서울 종로구 이화장1길 32
(지번) 이화동 2-1
불법연구회 수달장자인 황정신행이 가꾸어 이화장이라 이름 붙인 이곳에 소태산 대종사 방문한다
1931년 황정신행은 낙산 기슭에 있는 이화동 호박밭 야산 3,000평을 매입해 손수 감독하여 집을 짓고 이화장(梨花莊)이라 이름한다.(『황온순, 천성을 받들어 90년』, 82쪽)
황정신행은 이화장에 살면서 원기20년(1935)년 금강산 여행을 갔다가 개성에 살고 있는 불법연구회 이천륜 회원을 만나 그의 보살행에 감동이 되어 그녀의 소개로 돈암동에 있는 불법연구회 경성지부를 찾아가서 이완철 교무와 이동진화 교무를 만난 후 불법연구회를 다니기 시작한다. 원기21년 陰 9월 1일(10월 15일) 32세시 입교하게 되며, 몇 달 뒤인 원기22년(1937) 4월 경 경성지부 돈암동 회관에서 소태산 대종사를 뵙고 정신행(淨信行)이란 법명을 받게 된다. 이후 소태산의 가르침에 따라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낙산을 넘어 돈암동 회관에 가서 이완철 교무에게 금강경을 한 시간씩 배운다. 불생불멸과 인과보응의 진리에 대한 열기가 일기 시작하여 그때부터 불법연구회의 수달장자로서 역할을 시작한다. 황정신행은 소태산 대종사를 이화장에 초대하기도 하였다.(앞의 책, 86~91쪽)
황정신행은 이화장을 이승만이 거처로 원하자 양도하게 되며, 1988년부터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와 프란 체스카 여사의 유품을 전시하고 있다.
「원불교 서울 성적지」기연 법문 및 순례 길라잡이
<소태산, 서울京城을 품다> 방길튼 저 (p.469)